몇 세기를 흘려보냈다. 그 중 절반이 안되는 시간은 ‘살았다’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 ‘살았다.’ 혹은 ‘살아가고 있다’라는 평범한 감정이 두려움으로부터 말미암아 태어나 영원을 조롱하고, 배신하고, 다시 죽게 만들었다. 그렇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나는 본능에 의거하여 시간을 소비했다. ‘소비’ 소멸되는 삶의 느낌을 겨우 붙잡기 위해 바지런히 소비...
낯선 이방인은 당당한 태도, 단 하나로 나를 몰아세우는데 성공했다. 의심을 벗어 자유로워진 그는 이제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었다. 내 자신이 이토록 멍청할 줄이야.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들이 글자 그대로 귀에 꽂혔다. 남자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와 눈을 마주한 그 순간 방안의 공기가 매섭게 식...
마담 체스터에서 나온지 15분 가량이 지났지만, 남자는 특정한 목적지 없이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남자는 모퉁이를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 설마, 내가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건가? 낯선 이방인과의 거리가 좁아질수록 심장이 요동치기시작했다.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었으니, 골목 초입에서 기다리면 돌아 나오는 그와 마주칠 수 있...
현관문을 여니 아침공기보다 싸늘한 집 안의 공기가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스티브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 위로 펄쩍 뛰어올라 엎드렸다. 피곤함이 몰려오는 듯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더니 이내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슬에 촉촉하게 젖어 무거운 겉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곤함과 나른함이 몸 이곳저곳에 피어올...
아니다. 내가 고민한다한들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단지 J가 죽었을 뿐이다. 그 뿐이다. 나는 억지로 소파 위에 몸을 구겨 넣었다. ‘J가 죽었다’ 아니 ‘살해’당했다. 누군가에게... 왜? 스멀스멀 머리속을 기어오르는 그녀의생각.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뜨거운 피의 역동적인 움직임.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에 맞춰 온 몸을 돌아다니는 무엇인가가 오래...
보스턴 외각의 한적한 동네. 인구라고는 채 500명이 되지 않는 소규모 동네다. 새로 이사 온 주민이 아닌 이상, 서로의 집안에 접대용 그릇이 몇 세트가 되는지 모두 파악하고 있을 정도니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겠지. 이 마을의 이슈는 대부분 제 생을 다해 죽었다거나, 누군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는 일 뿐이었다. (그 밖에는 ...
"역시 불편하군." 토르는 셔츠 단추를 채우며 불편한 기색을 툭툭 내비추었다. 손가락 하나면 금세 입혀지는 아스가르드 옷과는 달라, 토르는 매일 아침 입어야 하는 옷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옷의 구성품도 너무 많았다. 와이셔츠, 바지, 베스트, 넥타이, 자켓, 양말, 구두, 헹커치프까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구성품은 제각기 모양도, 활용도도, 그 색...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너는 평생 나와 자지 않을 것이라고. 짧은 입맞춤조차 허락하지 않는 너에게 나는 끊임없이 사랑을 애원하고 구걸하며 구질하게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너는 보란 듯이 우리가 함께하는 이 공간에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불러들여 입을 맞추고 사랑도 없는 행위를 하며 나를 밀어내고 있다. 나는 상관없다. 나는 꼿꼿이 그 자리에 ...
에필로그 토르의 눈꺼풀 위로 햇볕이 내리 쬐었다. 귀와 눈이 열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토르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워 앉았다. 바람이 적당히 선선하게 불어와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아침…?’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반쯤 감겨있던 눈을 완전히 떴다. 분명 아까까지 토르는 만찬 연회장에 있었다. 술을 마시며 시시콜콜한 영웅담을 들으며 앉아있...
3 대관식 전야제, 취한 듯 일렁이는 불꽃, 테이블이 모자랄 정도로 차려진 음식들. 켜켜이 쌓인 술통들. 게걸스럽게 음식과 술을 먹어치우는 아스가르드인들. 음식냄새와 술 찌꺼기 냄새 그리고 토해 내는 숨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계집이 싸구려 향수냄새를 흘리며 지나가면 사내들은 특유의 수컷냄새를 뿜으며 쫓아가기 급급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밤이었다. 저...
2 “로키님, 오딘님께서 부르십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이를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헝클어진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다듬었지만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것도 의식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본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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